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콩 영화 (문단 편집) === 1980년대 === >1980년대 홍콩영화는 찬란한 '''백화만발'''의 시대였다. 그건 많은 시간과 경험이 토대를 이루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. > 증지위, 2005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[[http://www.cine21.com/news/view/?idx=0&mag_id=33874|링크]] 홍콩영화는 1980년대 커다란 전성기를 맞는다. 정확히는 1988년 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한 해에 100여편 이상 제작 될 정도로 호황을 맞았다. 이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는데, 60-70년대부터 쌓여온 노하우나 인력, 인프라가 1970년대 선진국의 영화학교서 유학하고 돌아온 감독들과 결합되어 시너지 효과를 내었기 때문이다. 그리고 당시 [[동아시아]]에서 북한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은 말할 것도 없고 대만과 한국까지 모두 독재 정권 시대로서 자유로운 창작이 어려운 때이기도 했다. 이러한 때에 영국의 통치로 그 이전부터 이미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했던 홍콩이 그간의 축적된 힘으로 크게 성장하는 건 당연지사. 표현의 자유는 확실히 인정되었지만, 1950년대만 해도 영국인들은 중국계 홍콩인들을 대놓고 차별했다. 참정권도 1960년대가 되어서야 민주적으로 개혁된 것이지만, 현재보다 더 민주적인 제도는 아니었고, 영국인 총독 추천 입법의원 비율도 꽤 되어서 영국이 마음만 먹었으면 홍콩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다. 그리하여 1960년대만 하더라도 홍콩인들의 친중 반영 시위가 상당히 잦았다. 쇼브라더스와 [[무협영화]]는 70년대 이후 계속 침체였지만, [[이소룡]] 사후 한동안 주춤했던 골든 하베스트가 [[성룡]]을 내세운 [[코믹]] [[중국권법|쿵푸]] 영화로 두각을 나타내며 [[중화권]]을 넘어 세계 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낸다. 이렇게 영화가 돈이 된다는 것이 알려지자, 홍콩 영화판에는 자본이 모여들기 시작했고, 홍콩 영화는 무술에 한정되지 않고 여러가지 장르가 나왔다. 칼 대신 권총을 잡은 현대식 무협인 [[홍콩 느와르]](특히 [[오우삼]] 감독을 위시한 느와르 작품들), 사극과 특수효과를 버무린 중국 고전 판타지 장르(대표작 《[[천녀유혼]]》), 그리고 《[[최가박당]]》과 같은 개그물 등등이 있다. 과거 홍콩 영화는 해외 중 한국·싱가포르·대만에서 유독 유행이었는데, 보통 [[무협 영화]], [[중국권법|쿵푸]] 영화 정도가 해외에서 흥행했던 홍콩 영화가 유독 한국·싱가포르·대만에서는 그 밖의 장르도 반응이 좋았다. 그래서 [[주윤발]], [[유덕화]], [[양조위]], [[장국영]], [[왕조현]], [[임청하]], [[주성치]], [[여명(홍콩)|여명]], [[곽부성]] 등 무협과 크게 관련 없는 홍콩 스타들도 자주 [[내한]] 했고, 국내 CF에도 종종 출연했다.[* 심지어 한국에선 '누구야?' 소리 듣던 등광영이나 서소강까지 한국에 왔었다. 정확히는 유덕화와 같이 왔던 것이지만.][* 반면 당시 홍콩에서 인기를 누리던 [[양가휘]]는 1992년 '신용문객잔' 홍보차 방한한게 전부였고, [[장만옥]]도 홍콩영화 전성기에 방한한 적이 없다가 2000년 '화양연화'가 한국에서 개봉할때 첫 방한했다.] 2000년대 이전에는 한국·싱가포르·대만이 홍콩 영화의 최대 해외시장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홍콩 영화계에서도 한국을 많이 신경 써서 내한이 잦은 편이었다. 대만은 홍콩영화의 주요 수출국가 중 하나였는데, 위에서 언급한 쇼 브라더스나 골든 하베스트를 제외한 나머지 소규모 영화사들은 배급라인은 고사하고 영화사를 지탱할 자금력이 없었기에 홍콩 영화 제작사들이 한국, 대만, 싱가포르, 동남아 시장에도 기댈 수 밖에 없었다.[* 그나마 이 두 큰 회사들 덕분에 대만을 포함한 다른 아시아 국가에 홍콩영화를 수출 할 수 있는 통로를 열게 되었다.] 1980년대 초반에 20% 이상 늘어났고, 80년대 중후반 중국과의 양안관계가 조금씩 풀리면서 수출비중이 30%까지 늘어난다. 1970년대 부터 대만의 큰 부호들을 중심으로 홍콩 영화시장에 투자하는 비율이 30% 이상 늘어났지만, 이는 삼합회가 개입하는 계기가 되고, 90년대 초반 홍콩 톱 배우들이 한 해 10여편 이상 다작을 하면서 이미지를 소비하는데에 이바지 하게 된다.[* 홍콩영화의 부흥기를 직간접적으로 접한 한국인들이 홍콩배우들이나 홍콩영화들의 화려함을 사랑하고 그 시기를 그리워하기도 한다. 반면 수입국가의 갑질과 불분명한 소속, 그리고 삼합회 같은 조폭들의 개입 등 홍콩 영화인들의 어려움은 잘알려지지 않았다.] 반면 [[일본]]에서는 홍콩 영화의 인기가 한국에 비해 훨씬 적었다. 이소룡과 성룡은 일본에서도 아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[[이연걸]], [[주윤발]] 정도로만 넘어가도 일본에서는 인지도가 많이 부족했고, 인기도 없었다. 홍콩 영화 스타일이 일본의 정서와는 이질적이었던 점과 일본내 유사장르[* 홍콩 영화의 주력 장르인 조폭 느와르나 무술 영화였지만 일본 내에서는 이와 비슷한 전통적인 장르가 정착한 상태였다. 특유의 사무라이 [[찬바라]] 영화는 홍콩식 무협영화, 일본 특유의 느와르 장르인 야쿠자물은 홍콩식 느와르물과 유사한 결을 가지고 있다. 그러다보니 홍콩 영화는 일본 극장가에서 발을 붙이기 어려웠다. 반면 한국-대만에서는 1980년대 당시 검열때문에 범죄조직을 미화하는 느와르 장르는 절대 제작할 수 없었다.]의 선점, 일본이 해외 영화를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늦게 개봉하는 자국 영화 보호정책을 철저하게 펼쳤다는 점이 한 몫 한 듯 하다. '''그러나 달도 차면 기운다고, 9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던 홍콩 영화는 아래의 여러 이유로 크게 기울게 된다.'''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